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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금테안경

BundleE 2020. 2. 20. 16:18

⟪금테안경⟫, 조르조 바사니, 김희정 옮김, 문학동네

 

18개의 짧은 장들로 이루어진 ⟪금테안경⟫

1919년 파시즘이 발흥하던 시기의 페라라를 배경으로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삶을 가진 이비인후과 전문의 아토스 파디가티의 소개로 시작하고, 이탈리아 전역에 인종법 시행에 대한 요구가 들끓는 시기로 접어든 시점에서 짧막한 신문기사로만 알려진 그의 쓸쓸한 죽음으로 마친다.

 

베네치아 출신의 의사 파디가티는 그 도시 출신의 다른 의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의료 서비스와 훌륭한 인품, 호감을 주는 외모로 페라라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인물로 소개된다. 다만 그는 페라라의 다른 부르주아들과는 다른 삶의 방식(다소 소박한)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에게 끊임없는 호기심과 호감을 자아낸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그를 알고 싶어하던 사람들은 그가 게이라는 것을 알게되고 그를 다 알게되었다고 결론내린다. 사람들은 이제 그를 점잖은 게이로 규정하고 대하지만 파디가티는 이를 알지 못한다. 그가 사람들이 그의 성정체성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는 것은 페라라와 볼로냐를 오가는 기차에서 친해진 학생 무리들 중 델릴리에르스라는 아이 때문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파디가티가 '늙은 게이'라고 명시적으로 발화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정체가 알려져 있다는 것을 인식한 후로 파디가티는 급격히 위축되고 위엄을 잃는다. 학생 무리들 중 몇몇은 공개적으로 그를 모욕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경멸과 무시에 암묵적으로 동참한다. 아이들이 그를 모욕할수록 파디가티가 그들에게 비굴해지는 모습은 비참하다. 그러나 타인에 의해서지만 '밝혀진' 자신의 정체성 그대로를 경험하고 발전시켜보기를 원하는, 그러니까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보기를 원하는 파디가티의 간절한 욕망이 읽혀지는 대목이기도 했다. 슬펐고 공감했다.

 

“저것 좀 봐!” 그가 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처럼 자신의 본성을 받아들여야겠지.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지? 너무 비싼 대가를 치뤄야 하지 않을까?” (123)

 

단지 자신의 본성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발현하는 삶을 시도한 파디가티에게 가해지는 교묘하거나 노골적인 공격과 모욕, 그리고 이후 페라라에서의 가파른 몰락. 그에 대한 파디가티의 감정은 길에서 만난 잡종개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15장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애인이었던 델릴리에르스에게 이용당한 뒤 버림받고, 페라라의 대부분의 부르주아들이 파디가티를 비난하고 경멸할 때, 화자는 파디가티의 친구로 남는다. 파디가티가 동성애자로 느끼고 있던 잔인한 소외감과 모욕을 화자는 유태인으로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라라의 부르주아들에게 친구와 이웃으로 살아가던, 심지어 충실한 파시즘의 동료 지지자였던 유태인들은 별안간 그들과는 다른 존재, 분리되어야 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우리 이탈리아에서는” 그(니노)가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그와 같은 자들(게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니? 행정권의 부여된 모든 권한을 활용해서 처형하는 거야. 그러곤 안녕인거지. 지금 같아서야 이탈리아 사회가 하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말을 마쳤다.

“놀랍군”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머잖아 나는 불결한 유대인이라고 부르겠지.” 그는 대답을 망설였다. (108-109)

 

“이탈리아인이 인정할 수 있을까요? 다른 이탈리아 시민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단지 한 명의 유대인이라는 걸 말예요.”...”뭘 해야 하지요?” “내가 나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원하든대로 순응하는 것?”...

(파디가티) “이봐, 내 소중한 친구,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게 훨씬 인간다운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넌 여기 나와 같이 있지도 않을테지!).” (123)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 만으로도 대가를 치뤄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생긴대로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사는 것이 속편하고 건강하다고 격려하는 사회에서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 금테안경에 등장하는 페라라의 부르주아들, 명문가 자제들은 원하는대로 말하고, 생긴대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들은 어떤 무례라도 저지를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듯 행동한다. 그들은 타인을 자신들이 내린 정의(definition) 안에 가둔 후 옴짝달싹 못한채 질식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자들이다.

 

“그럴만해” “이상하긴 했어, 확실히” 파디가티의 결함을 늦게나마 알게된 것에 대해...오히려 안심하며 대체로 즐거워했다...이제 모든 것이 밝혀졌으니 그의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라고 사람들은 말했으며, 마침내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19-20)

 

성정체성을 알았다는 이유로 한 인간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되었다고, 이제야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게되었다는 페라리의 부르주아들. 동등한 이탈리아 시민이며 존경하는 이웃이자 친구인 유대인들에게 닥친 어두운 운명 앞에서 우월감을 느끼는 그들. 내가 나라는 이유로, 그것이 게이이건 유대인이건, 모욕과 경멸을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게되는 경험이었다. 우리는 1919년의 페라라와 얼마나 다른가? 조금은 앞으로 나아갔는가? 자신의 타고난 본성의 문제가 삶의 중요한 것들을 좌지우지하는 세상에서 게이에겐 유대인이 있고, 유대인에겐 게이가 있어 다행이다. 파시즘과 나치즘으로 광분한 세상에서 그들만이 인간다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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