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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284)
여기 우리들의 신학
"연구"와 "행함"이 자기구원에 이르려는 시도가 아니라면, 왜 사람들은 "연구"하고 "행했을까?"...계명에 순종하려 했기 때문이요, 하나님께 가까워지려 했기 때문이다. ......토라를 연구하는 목적은 토라를 주신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으려 함이요, 할라코트를 지킴은 하나님이 임재하셨다는 느낌을 일깨워준다. 따라서 랍비들이 따랐다 하는 율법주의의 핵심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접촉을 유지한다는 느낌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고 느끼는 사람은 선한 마음으로 토라를 "연구"하고 "행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아버지 뜻을 행하고 그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이 임재하셨다는 느낌을 강화해준다. 말 그대로 하나님을 일상생활에서 거듭 만나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랍비 문헌을 그저 간접으..
"그녀는 이스라엘의 행동과 목표, 꿈에 저항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약속을 한 걸음 더 진전시킨다. 자신의 도시와 백성을 진멸시키는데 공모하는, 즉 단지 배신을 통해서만 이스라엘의 약속을 진전시킬 수 있음에도 그녀를 신뢰할만하고 용기있는 여성으로 여기는 것은 자신의 죽은 동포들처럼 그녀 역시 죽은 것이라는 점을 간과하는 것이다. 비록 육체적으로 살아있다 해도 그녀는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죽은 것이다. 이제 그녀는 "이스라엘 인들보다 더 용이하게 신명기를 인용하는" 사람으로서만, 그러니까 완전히 식민화된 정신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 라합은 제국주의의 "문화적 세례"를 한껏 받은 문화적 화신이다. 응구기와 치옹고에 의하면 제국주의의 문화적 세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갖고 있던 이름, 언어, 환..
"랍비들의 율법주의는 은혜에 따른 선택과 확실히 보장된 구원이라는 더 큰 맥락 속에 들어있다. 랍비들은 불순종과 순종, 형벌과 보상을 논하면서,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는 다루지 않았지만, 사람이 언약 틀 안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행동하시는가는 다루었다. 그들은 언약 틀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명령을 최선을 다해 이해하며 순종하고자 했지만, 자신들이 계명을 따른 의무를 이행한 숫자에 따라 언약 속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얻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사람이 언약 안에 머물려 하고 이런 의도로 참된 참회를 표명하는 한, 하나님은 그 사람이 계명을 이행하거나 어긴 숫자를 꼼꼼하게 헤아리시지 않았다. 하나님이 엄격하게 심판하신다면, 살아남을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족장들도 하나님이 엄히 ..
1차문헌을 다루는 2차문헌들을 읽으면서 생기는 효과: 1) 호기심이 생긴다 그러나 동시에 2) 대단한 책을 읽는 것에 대한 부담이 커진다 3) 여기서 찔끔 저기서 찔끔 남들이 말한 것을 듣다보니 안다는 생각이 커지면서 읽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행복회로를 돌린다 4) 안그래도 바쁜 세상 2차문헌의 저자들의 1차문헌 이해와 해석을 신뢰하기로 한다 5) 결국 크리티컬한 순간에 크리티컬한 헛소리를 하게 된다 E.P. 샌더스에게는 유대문헌이 1차 자료. 나에게는 바파유가 1차 자료. 바파유는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권면을 반복해서 들었음에도 이 책을 손에 넣기까지 몇년을 망설였다. 내가 읽지 않으리라는 걸 너무 잘 알아서. 최근 더글러스 캠벨의 강연이 내게 다시 바파유를 소환시켰다. 김선용박사님이 간추려 알맹과 ..
신학이라는 것이 학문이기만을 고집할 수 있을까? 이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본질, 인간 관계를 다루며 교회 공동체의 성격과 조직과 운영을 고민하고, 더 나아가 믿는 민족(공동체)의 정체성과 믿는 자들의 공동체가 마땅히 사회에서 해야할 역할을 논한다. 선지자들과 예수와 사도들은 신학의 이러한 공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을 삶 전체로 증거한다. 그들은 각자 처했던 역사적 맥락과 공동체의 현실, 그리고 개인의 특성에 따라 자기 공동체와 세상을 향해 대단히 다른 색의 의견과 다른 톤의 목소리를 냈고 성서의 저자/편집자(혹은 성령)는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한국에서 신학이라는 영역을 계속 탐구 중인 학생으로 문득 한국 신학계에서 '시대의 목소리'라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신학교에 가보니 신학을 진지하게 공부하는 ..
고대 그리스 이후의 정치사상을 분석할 때, 창조의 이야기에 대한 두 가지 성서 해석 중 어떤 것이 인용되는지를 알아보면 언제나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과 바울의 가르침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의 뚜렷한 특징이다. 남편과 아내의 과게를 논하면서 예수는 1:27을 언급한다. "태초에 그들을 만드신 이가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을 너희들은 읽어본 적이 없느냐"( 19:4). 반면에 바울은, 비록 후에 "남자는 여자 없이 존재하지 못하며 여자도 남자 없이 존재하지 못한다"(, 11:8-12)라고 말함으로써 남자에 대한 여자의 종속성을 약화시키고 있지만, 여자는 '남자에게서' 창조되었고 따라서 '남자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두 주장의 차이점은 여자의 역할에 관한 태도의 차..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가 아닐 개연성이 높다. 어느 복음서에서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수난의 자리를 지켰고, 매장을 지켜보았으며, 빈무덤의 첫증인이자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만난 사도 중 사도다. 그러나 이런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는 우리 머리 속에 남아있지 않다. 해석의 역사 안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남성들에 의해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죄인 여자라고도 불리고, 창녀라고도 불리고 심지어 간음한 여인이었다고 회자된다(모두 본문이 지지하지 않는 주장이다). 그래서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를 다른 제자들에 비해 우습게 생각하고, 여성들 또한 그녀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지 못하게 되었다. 남성들이 기록과 해석에서 지은 죄가 깊고도 깊도다. 회개해야 할텐데.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기도가 ..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마르다와 마리아는 같은 자매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모두 자매가 베다니에 살았다고 한다. 물론 요한복음은 그 자매에게 죽었다 소생한 나사로라는 남자형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그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꼼꼼히 본문을 읽다보면 나사로는 그냥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비적 사건으로 고안된 인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요한복음에서도 그 비중이 크지 않다. 11장과 12장에 걸친 이 남매들의 이야기에서 나사로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께 전하는 전갈에 등장하거나 무덤에서 천에 둘둘 말려서 나오는 기괴한 장면에 등장하거나, 마르다가 베푼 잔치에서 예수와 무리들 사이에 '끼어'앉아 있는 것으로 등장할 뿐 말 한마디 없다. 그에 비해 ..
은유에 대한 리쾨르의 관심은 언어의 규칙과 창조성 사이의 연관관계를 밝히려는 노력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창조한다는 것은 규칙과의 투쟁이다. 무로부터의 창조란 없다. 창조한다는 것은 주어진 규칙으로부터 새로운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활동이다. 김애령, , 221 ◇ 팟빵 :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69565 네이버 오디오클립 :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2453 iTunes : https://bit.ly/theoyws '구독'과 '좋아요'는 언제나 좋아요! #여우신 #여기우리들의신학 #신학
"어떤 독서가 진실이라고 공표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늘 다른 독서에 의해 무화될 수 있다. 한 가지 독서가 틀린 것으로 판명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늘 그 착란의 진실을 개진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폴 드 만, , 112-113, 김애령 , 161에서 재인용 ◇ 팟빵 :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69565 네이버 오디오클립 :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2453 iTunes : https://bit.ly/theoyws '구독'과 '좋아요'는 언제나 좋아요! #여우신 #여기우리들의신학 #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