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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284)
여기 우리들의 신학
(2) 인간으로는 살아있으나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간주되지 않는 자를 가리켜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라고 부른다. 레기온에 사로잡힌 남자와 혈루증 앓는 여인을 우리는 ‘호모 사케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호모 사케르들은 자신의 위치를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외부의 구원의 손길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사회적, 상징적 경계를 넘어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보인다. 예수는 발화되지 못하는 침묵의 아우성에 반응하시고 그들이 호모 사케르라는 위치에서 동료 시민, 이웃의 자리로 옮겨지는 일에 기쁘게 동참하신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호모 사케르의 개념으로 포섭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법적인 위치와 시민권을 부여받..
(1) 마가복음 5장은 세 개의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선 야이로와 그의 딸은 빼고, 레기온에 사로잡힌 남자와 혈루증에서 치유받은 여자에 집중해 보려한다. 레기온에 사로잡힌 사람은 남성이고 이방인이다. 혈루증 앓았던 사람은 여성이고 유대인이다. 이렇게 보면 대립항을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둘 다 '정과 부정'의 분류에서 ‘부정’에 속한다는 점, 살아있으나 살았다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 자신의 소원을 예수께 직접 고할 수 없었다는 점 마지막으로 예수를 만나 살아있는 죽음을 끝내고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먼저, 레기온에 사로잡힌 남자를 보자. 5장 1 -5절의 압축적 묘사, 그의 고통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가? 그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무덤들 가..
창세기 25장 1절~8절 본문을 성경으로 읽고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1-4절 아브라함은 사후에 유산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고자 이삭을 제외한 다른 아들들을 멀리 떠나보냈다. שׁלח (보내다)의 피엘형이 쓰였는데, 이는 그들이 다시 돌아올 기약없이 멀리 보내졌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그들을 덜 사랑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도 선택된 자들을 통해 자신의 구원 계획과 약속을 이루어가시지만, 선택되지 않은 자들을 덜 사랑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스마엘의 울음을 들으시고 물을 먹이셨고, 그가 자라는 동안 가까이서 돌보셨으며, 그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리라는 하갈과의 약속을 지키셨다. 하나님이 선택된 백성의 신이라는 생각은 어디서부터 연원했을까? 하나님은 한 때 선민인 이스라엘의 ..
신학을 공부하면서 점점 더 성경읽기에 관심이 집중된다. 조직신학도 좋고, 교회사도 흥미롭지만 물론 그 모든 것들을 알면 나의 성경읽기는 훨씬 더 풍부해지겠지만 기독교라는 종교와 교회라는 조직에서 벌어지는 모든 주장의 최종 권위는 결국 성경을 향하고, 그래서 내겐 그곳이 최종 결전지다. 아직 여물지 않은 성경읽기의 단상들을 여우신에서 공유해보려고 한다. 누군가 이 신학이 설익었다고, 좀 더 배운 뒤에 말하라고 타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물 주고 솎아주고 김매는 농부의 비판이 아니라 될성싶지 않으니 엎어버리라는 행인의 별의미없는 손가락질에 굴하지는 않겠다. 서툴어 말할 수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신학에서 나와 그들의 언어로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