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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284)
여기 우리들의 신학

⟪여성, 타자의 은유⟫, 김애령, 그린비, 2012 니체, 레비나스, 데리다가 “타자”의 의미를 구성하고 전달하고기 위해 사용하는 “여성”이라는 은유에 대한 비판적 논의. 이 세 명의 철학자들은 주체의 입장에서 타자를 전유하지 않고 그 차이(혹은 차이내기)를 포착하려 한다. 이 때 발생하는 가장 당혹스러운 문제는 “어떤 언어로 타자를 말할 수 있는가”이다(72). 니체가 지적했던 바와 같이 모든 철학적 개념화는 주체를 중심으로 *동일화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72).레비나스, 니체, 데리다는 타자의 언어화 불가능성을 수사적 표현과 장치로 풀어내기를 시도하고, “타자”에 대한 개념화를 피하기 위해 다른 몇 개의 은유와 함께 여성 은유를 사용한다(73). 저자 김애령은 각 철학자의 사유에 대한 독자의 충실한 ..
“예수가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어떻게 반유대주의와 연결되는 건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 시대에 유대문화에만 가부장적 전통이 있었던 건 아니었을텐데요.” 반유대주의(Anti-Semitism)란 (특히) 기독교의 유대인에 대한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기독교 세력에 의한 유대교 탄압이나 유대인 학살의 역사와 관련된다. 590년 최초로 교황으로 불리게 된 그레고리우스 1세의 유대교 탄압을 시작으로 교부들의 반유대 설교나 기독교인들의 유대교 회당 공격, 유대인 학살등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특히, 1077년 이슬람 셀주크투르크의 예루살렘 점령으로 유발된 십자군 원정에서 우르바노 2세 교황이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해 이단자들을 죽이는 것은 십계명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선포했는데, 이를 계기로 무슬림뿐만 아..
인간해방이 아닌 여성해방이어야 한다는 말이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해방이 아닌 ‘여성해방’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여성이 여전히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고 그래서 ‘여성’의 해방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인간으로 간주되지 못한 모든 존재들, 그래서 억압과 배제와 착취와 폭력의 대상이 되는 모든 존재들의 해방이 우리 싸움의 최종적 목표로 설정되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나? 자본과 권력과 이데올로기를 선점한 세력에 대한 싸움은 그 무수하고 무력한 비존재들의 연대로만 가능하지 않을까? 성이라는 것이 본질적이냐, 구성적이냐는 페미니스트 진영의 오래된 논쟁이다. 여전히 우리는 sex는 생물학적인 성, gender는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된 성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생물학적 ..
나의 페미니즘적 사고는 어설프기 짝이 없다. 개념들은 애매하고 종종 모순되며 내뱉는 말들은 대개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빗나가거나 탈락한다. 그래서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것은 부끄럽다. 그런데도 내가 속한 그룹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로 여겨진다. 일상에서 생각나는대로 느끼는 대로 말하는 것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 (벨 훅스의 표현을 빌어 스스로를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여튼, 그러다 보니 페미니즘의 이슈를 가지고 내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오늘 문득 이런 대화가 기억이 났다. J: 페미니즘이 그러니까 인간해방하자는 거잖아요? 여성만 해방하자는거 아니잖아요? 그지요? 페미니즘이 자신의 의제를 보편적 인간 해방으로 설정한다면 남성들도 페미니즘 다 지지할텐데. 여성..

⟪금테안경⟫, 조르조 바사니, 김희정 옮김, 문학동네 18개의 짧은 장들로 이루어진 ⟪금테안경⟫ 1919년 파시즘이 발흥하던 시기의 페라라를 배경으로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삶을 가진 이비인후과 전문의 아토스 파디가티의 소개로 시작하고, 이탈리아 전역에 인종법 시행에 대한 요구가 들끓는 시기로 접어든 시점에서 짧막한 신문기사로만 알려진 그의 쓸쓸한 죽음으로 마친다. 베네치아 출신의 의사 파디가티는 그 도시 출신의 다른 의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의료 서비스와 훌륭한 인품, 호감을 주는 외모로 페라라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인물로 소개된다. 다만 그는 페라라의 다른 부르주아들과는 다른 삶의 방식(다소 소박한)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에게 끊임없는 호기심과 호감을 자아낸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그를 알고 싶어하던 사람들..

레위인의 첩은 이름도 목소리도 없는 여성이다. (이 사건이 전개되는 사사기 19장에는 모든 등장인물들이 이름이 없다.) 사사기 19장에 따르면, “에브라임 산악지대 깊숙한 곳에 사는 레위인이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한 여자를 첩으로 얻은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부정을 저지른 후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에 있는 자기 친정으로 달아나 넉 달째 머물고 있었다(삿 19:1~2, 쉬운말 성경)”. 그녀가 ‘부정’을 저질렀다 혹은 ‘행음했다’ (개역개정)는 의미가 부정한 성행위를 뜻한다면 아내를 찾아 베들레헴까지 간 레위인의 행동이나, 딸을 다시 받아들인 레위인의 장인이 행동이 다 말이 되지 않는다. 요세푸스는 레위인이 아내의 미모에 반해 아내를 무척 사랑했으나 아내는 그런 남편을 역겨워해서 싸움이 잦았고..

입다의 딸은 이름은 없지만 목소리는 가진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 입다가 경솔하게 내뱉은 서원 - “주께서 제게 암몬 사람들을 넘겨주신다면...집에서 저를 가장 처음으로 맞이하는 사람이 누구이든, 그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를 주께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삿 11:30~31, 쉬운말 성경)” - 을 지키기 위해 제물로 바쳐진다. 주석자들은 입다의 이 서원이 이스라엘의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에서 사람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레18:21, 20:2; 신 21:31, 18:10 등). 그렇다면 입다의 서원 자체에서 이스라엘이 얼마나 가나안의 문화에 젖어있는지를 볼 수 있다. 입다는 자신의 승리를 축하하며 춤을 추며 영접하는 딸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어찌할꼬,..

사사기 4~5장은 드보라라는 여성의 이야기로 시작해 야엘이라는 여인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드보라가 ‘랍비돗의 아내인 여자 예언자 드보라’라고 묘사되는 것을 보면, 여성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누구의 아내’ 혹은 ‘누구의 딸’이라는 점을 볼 수 있지만, 드보라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랍비돗의 아내로서가 아니라 ‘드보라’로 활동했다는 것을 ‘드보라 종려나무’라는 구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드보라가 사사였던 시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여성과 남성은 어떤 의미였을까? 내가 상상하는 것처럼 그렇게 완전 가부장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고, 여자는 이래야 하고 저러면 안되고 이걸 해야 하고 저걸 하면 안되고 식으로 여성이 규정되어 있지도 않은 다소 자유로운 느낌이다.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 종려나무’..
비극의 비밀: 운명 앞에 선 인간의 노래, 희랍 비극 읽기 강대진 지음, 문학동네, 2013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상관이 없는 것만큼이나 그리스 고전과 내가 무슨 상관인가... 라고 믿으며 오랜 세월을 꿋꿋이 잘 살아왔건만... 분명 신학책이라고 알고 읽는 책에서 자꾸 를 언급하는 것이다. 게다가 아...놔... 신학책의 저자가 “독자님, 는 당연히 읽으셨죠?”...라고 전제하는 바람에...읽은 척... 했다. 그리고 어찌어찌 마지막 장까지 끝냈으나 이 찝찝함을 어찌해야 하누? 어이쿠... 내가 어쩌다 신학 공부를 하겠다고 덤벼서... 갈수록 태산이다. 도서관의 그리스 고전 서가를 서성이다가 작품을 읽을 용기는 나지 않아 《비극의 비밀》이라는 그리스 고전 작품 해설로 보이는 책을 뽑아 들었다. 다루고 있는..
시편 9편 13-14절(마소라 14-15절)에 흥미로운 표현이 눈에 띈다. “사망의 문으로부터, 미샤아레 마베트(13) -> 시온의 딸의 문에, 베샤아레 바트-찌욘(14)” 시인은 적들의 미움으로 고통당하며 ‘사망의 문’ 앞에 있는 자신을 끌어올려 ‘시온의 딸의 문’ 앞에 놓아달라고 간구한다. 그곳은 하나님의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는 곳이며 따라서 주님의 구원이 실현되는 장소이다. 시온의 딸은 보통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성문 앞은 재판의 장소였는데 오늘날, 기독교의 맥락에서는 이 장소가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는 빠른 속도로 약자들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사망의 문’과 같은 장소가 되고 있다. 그래서 그와 대립 국면을 형성하는 하나님의 생명과 정의와 자비의 공간으로서의 교회가 절실하다. 교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