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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우리들의 신학
돌아보니 나도 고난주간이면 예수의 고난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이런 저런 노력을 했었다. 한 번은 『예수는 왜 죽었는가: 신화가 아닌 역사』(문학동네)를 읽었고, 또 다른 한 해에는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정독했다. 영화를 보기도 하고 복음주의 서적을 뒤지기도 하면서 늘 충분히 괴롭지 않은 나를 괴로워하며...그렇게 고난주간을 보냈던 것 같다. 이젠 그런 격한 감정을 그리워하지 않은 지 꽤 되었고, 교회를 떠나 있다 보니 언제가 고난주간이고 언제가 부활절인지 달력을 손가락으로 짚어야 알게 되는 수준이다. 오늘 청어람 빡센 독해를 신청해서 프랑수아 보봉이라는 학자의 『예수의 마지막 날들』이라는 책을 함께 읽었다. 이번 주중에 나는 아마도 성공회 달력을 보며 다음 주일이 부활절이네 하는 생각을..
유대인 여성 신약학자이자 불가지론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Amy-Jill Levine과 감리교 신자이자 복음주의 신약학자인 Ben Witherington이 함께 누가복음 주석을 집필했다. 둘은 본문과 구절의 해석에 대해 각자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토론의 결과도 알려준다. 색다른 의미에서 매우 흥미롭다. 레빈과 위더링턴의 의견이 나란히 제시될 때 마다 과연 복음주의 신약학자가 불가지론자 인데다가 유대교에도 정통한 신약학자를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일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선한 관점들과 신학적으로 다른 입장을 가진 두 학자가 서로를 존중하며 나누는 대화에서 배울 것이 많은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https://www.amazon.com.au/Gospel-Amy-Jill-..
누가복음 7장 여자의 죄를 용서해 준 예수. 그에 대한 감사로 눈물로 그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입을 맞추며 향유를 부은 여자. 이 본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은 안 해봤다. 예수가 여자가 다른 사람에 대해 저지른 죄를 용서해줬다면? 여자는 회개했지만 자기 범죄의 피해자에게 용서를 받지는 못했다면? 그런데 예수가 신적 권위로 여자에게 "네 죄가 용서받았다, 평안히 가라"라고 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얘기는 아주 묘하게 흘러간다. 바리새인 시몬의 집 연회에 동석한 자들의 "자기가 누군데 죄를 용서하냐"는 수군거림에 동조하고 싶어지는 방향으로 말이다. 이 이 본문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나? 여기 우리들의 신학 팟캐스트 팟빵 : podbbang.com/ch/1769565 네이버 오디오클립 : aud..
hysteresis: 이력현상 생태계의 역사가 현재 상태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방향을 되돌리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든다. 생태계가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현상을 히스테리시스라고 한다. 부영양화된 연못은 비용이 들지만 결정질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 그러나 사바나가 된 열대 우림은 되돌릴 수 없다. 따라서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복원은 보존보다 비용이 많이 든다. 약 11,000년 전에 농업을 정착시킨 이후로 우리가 형성한 제도, 물리적 기반 시설 및 사회적 관행도 '히스테리시스'를 나타낸다. 큰 윤곽에서 말하자면 그들은 안정적인 생물권 조건에서 형성되었다. 우리가 과거에 한 투자를 되돌리기 어렵기 때문에 자리 잡힌 상황을 갑자기 바꾸려면 비용이 많이 든다. 금융 세계에서 이 현상은 일반적으로 ..
어제, 2022년 첫 페미니즘 이슈 북클럽 『공포의 텍스트』 가 마무리되었다. 신약전공생이 되고 나서 이 핑계 저 핑계로 멀어졌던 구약성서였다. 정말 오랜만에 구약 성서를 읽자하니 생각보다 장벽이 높았고, 참가하시는 분들께 송구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튜터 역할을 맡은 내가 버벅거리니 참가자들의 활약이 눈부셨다. 구약성서 본문, 트리블의 텍스트 뿐 아니라 다른 독서의 경험과 삶의 경험을 끌어들여 야밤의 대화가 참으로 풍요로워졌던 것이다. 이번 북클럽의 마지막 본문은 사사기 19장에서 시작해 20장, 21장으로 이어지는 복수, 윤간, 사체 훼손, 말도 안되는 내전, 살육, 여성 납치, 강간의 단초가 되는 자기 첩에게 앙심을 품은 레위인과 유대 베들레헴 출신의 한 여인의 이야기였다. 사사기 19,..
God comes not in the loud voice of an avenging angel, but in the small voice of a prophet who promises. - François Bovon(2002), 78 하나님은 복수하는 천사의 큰 음성이 아니라 약속하는 선지자의 작은 음성으로 오신다. 여기 우리들의 신학 팟캐스트 팟빵 : podbbang.com/ch/1769565 네이버 오디오클립 : audioclip.naver.com/channels/2453 팟티 : podty.me/cast/194201 iTunes : bit.ly/theoyws '구독'과 '좋아요'와 '댓글'은 언제나 환영해요.
"꿈틀은 진짜 하긴 하는데, 사는 게 바빠 따로 꿈틀할 시간을 빼는 게 쉽지 않아 그렇다. 노동 시간도 긴데 투쟁 시간까지 따로 안 빼도 되게 억압 너무 안 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막장같던 선거(정말 사람 답답하게 만들고 격노하게 했던)와 윤석열 당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실제로 머리를 비우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의 말이 딱이다. 사는 게 바빠 따로 꿈틀할 시간을 빼는 게 쉽지 않아 그렇다. 사는 것도 정신없어 죽겠는데 정말 상식선에서 눈 딱감고 넘어갈 정도로만 지랄했으면 좋겠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24&artid=202203111117471 [오늘을 생각한다]당선 축하 말씀 올리며 국민 친구..
논문의 주해 장을 시작하기 전에 경건한 마음으로 (주의를 환기할 겸), 주석들을 읽기로 마음먹고 어제는 Bovon의 Luke 1을 찔끔, 오늘은 Wolter의 the Gospel According to Luke를 읽어보려고 용을 쓰고 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잘 파악되지는 않지만 Wolter의 주석이 훨씬 안 읽힌다. Wolter의 책은 집에 있고, Bovon을 읽으려면 도서관을 가야해서 주말엔 꼼짝없이 Wolter를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며 온라인 서점을 둘러보다가 일단 Wolter에 다시 집중해보기로 한다. 공관복음서 문제를 다루는 부분이다. Albert Fuchs라는 학자의 주장이 어째서 공관 복음서 문제의 해결에 기여했다고 볼 수 없는지 논증한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마지막에 이 ..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덕영 옮김, 도서출판 길, 2010, 247-248 "그러나 우리의 고찰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언제나...모든 교파는 되풀이해서 종교적 '은총 상태'를 인간을 피조물의 타락성과 '세속'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종의 신분으로 파악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분의 획득은 어떤 주술적, 성례전적 수단을 통해서나 고해에 의한 죄사함을 통해서 혹은 개별적인 경건한 공로를 통해서 보장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연적' 인간의 생활양식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특별한 종류의 품행으로 말미암은 확증을 통해서 보장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각 개인은 실천적인 삶의 방식 속에서 자신의 은총 상태를 조직적으로 검증하고 그것을 통해 금욕주의적으..
새로 번역되어 나온 필리스 트리블의 『공포의 텍스트』를 읽고 있다. 하갈의 이야기를 읽었는데...뭐랄까 이렇게 피해자 서사로만 읽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사라를 압제자, 여족장 matriarch라고 부르는 것은 수긍이 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순종했다는 표현도 하갈이 이스마엘을 '섬겼다'는 표현도 이상했다. "이 이집트 노예 여성은 이스라엘의 허물로 인해 하나님께 치이고 벌 받고, 고통당한다. 그녀가 상한 것은 사라와 아브라함의 죄악 때문이다. 그녀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그들이 온전하게 된다." (65쪽) 이사야서와의 상호본문성으로 해석한 것인데...와...너무 이상하다. 정말 이렇게 읽는다고? 그래서 하갈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고 그것으로 사라와 아브라함이 온전해 졌다고?? 이런 해석이 가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