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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여기 우리들의 신학 (185)
여기 우리들의 신학

겨자씨 비유에 대한 크로산의 해석: "...겨자는 밭을 망쳐 버릴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겨자풀은 정원에서 재배될 때조차도 위험하며 또 밭에서 제멋대로 잘라 때는 치명적이다...그리고 둥지를 트는 새들이 우리에게는 매력적인 인상을 줄지 모르지만 고대 농부들에게는 곡식들을 쪼아먹는 끈질긴 위협을 뜻하는 것이었다...이 비유의 요점은 겨자풀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 곳을 점령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 통제할 수 없는 것이 되기 십상이라는 점, 그리고 특히 새들이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경작지 안으로 새들을 끌어들이기 쉽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가 말한 바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말해 준다. 즉 하나님 나라는 모든 것을 덮어 버리는 위험한 특성과 쏘는 맛을 가진 겨자풀과 같다는 것이다. 예수가 말한 하나님..
“…인자 예수를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 아직 완수되지 않은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와 발전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퀴리오스-호칭의 문제는 예수가 그 호칭으로 인해 하나의 공식적인 권위로 올라설 수 있다는 점이다.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권위에 헌신하려는, 도저히 근절되지 않는 욕구가 있다. 종교사와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해 드러나듯이, 절대화된 “주님”에 대한 헌신이 위험한 에너지를 촉진시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주님되심, 다르게 표현하여, 예수의 권위는 언제나 갈릴리 유대인 예수,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예수,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향해 비판을 멈추지 않았던 예수, 하나님의 은총을 선포한 사람 예수, 종교적 적대감과 국가 권력의 희생물이 된 예수와 연결되어 있어야 한..

전성민 교수의 『세계관적 성경읽기: 콘텍스트를 품고 다시 텍스트로』를 읽었다. 들어가는 말에서 저자는 이 책이 최종원 교수의 『텍스트를 넘어 콘텍스트로』(비아토르)맥을 같이한다고 말한다. 나는 최종원 교수의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그가 독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많이 받았던 질문이 “콘텍스트로 나아간 다음 텍스트는 어떻게 되나요?” 였고, 저자는 그 질문에 답이 될 만한 책을 쓰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제1부 세계관적 성경읽기와 제2부 한국 기독교 세계관의 자리와 방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세계관적 성경읽기가 무엇인지 말하고 있는데 저자는 그것을 (1) 세계관의 자리와 방향을 찾아가는 성경읽기, (2) 하나님의 창조를 긍정하며 대화하는 성경읽기로 제시한다. 세계관의 자리와 방..
나는 장애를 가진 사회구성원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드물다. 겨우 귀동냥이라도 하기 위해 유튜브나 포털 뉴스를 기웃거리는 정도다. 나같은 사람에게 4월 23일 무지개 신학교에서 개최한 에서 나누어진 한신대 신학생이었고 현재는 장애인권 활동가인 유진우님의 이야기는 깨달음의 기회였다(내 이야기가 아닌 것에 나는 뻔뻔할 정도로 무심하고 냉정할 수 있다. 그런 방식으로 비/자발적으로 차별과 억압에 동참하고 용인한다). 그는 장애를 가졌지만 목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한신대학교에 입학했고 마지막 학기에 자퇴를 했다고 말했다. 학교도 교회도 그가 할 수 없는 일들을 열거하며 목회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기 위해 요구되는 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자퇴한 지 4개월, 여전히 교단과 학교는 장애인..
“나를 여인으로 만들지 않으신 주여 찬양받으소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찐으로 우러나는 기도가 여전히 웅얼웅얼 생활소음으로 낮은 음자리에 깔려있다. (그러나 기회만 된다면 메인 멜로디가 되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를 퀴어로 만들지 않으신 주여 찬양받으소서” 라는 멜로디가 높은 음자리로 저 기도 위에 얹혀지면 꽤나 어울리는 화음을 자아낸다. 이 합창의 싱어이면서도 나는 다르다고 깨어있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우둔하고 악한 종들이 판치는 판에 심판의 하나님은 아직도 침묵 수행 중이신가. 주여 어느 때 까지니이까!! 여기 우리들의 신학 팟캐스트 팟빵 : podbbang.com/ch/1769565 네이버 오디오클립 : audioclip.naver.com/channels/2453 팟티 : podty...
"소피스트들이 일반 대중 뿐 아니라 플라톤과 뒤를 이은 철학자들에게 불러일으킨 반감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소피스트들의 지적 우수성에서 비롯되었다. 전심전력을 다해 진리를 추구하다 보면 도덕적 고려를 무시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특정한 진리가 주어진 사회에서 덕성을 높이고 교화하는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점을 미리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소피스트들은 논증이 그들을 어디로 이끌든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논증을 따라가다가 종종 회의주의에 빠지기도 했다. 소피스트 가운데 고르기아스(기원전 약 487-376)는 이렇게 주장했다고 전한다. "아무것도 실존하지 않고, 어떤 것이 실존하더라도 그것은 알려질 수 없으며, 그것이 실존하고 어떤 사람에게 알려질 수 있더라도 그는 그것을..
매 수업 전에 독서를 하고 온라인 게시판에 질문을 남기면 신약 교수님이 일일이 답을 해주신다. 질문을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읽게 되는 효과가 있고, 선생님의 답을 열어볼 때의 어떤 설렘 같은 것도 있다. 오늘 나의 질문과 선생님께서 주신 답 나: "예수가 종말을 기대했다는 사실에 대한 합의가 사라졌다"라고 보그가 선언하면서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SBL 예수 세미나 분과 회원들에게서 받은 설문 결과를 제시하는데요, 이런 방식이 학문적으로 지지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교수님: 예수 세미나의 학문적 의견수렴 방식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싸구려 다수결 방식이 통용되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 이의제기하는 것을 별로 본 적이 없습니다만 매우 기괴한 미국적 방식으로 보입니다. 이 짧은 두 문장에 밑줄 긋고..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상에 대해 주류 교단의 성직자들 사이에 이상한 침묵이 감돌고 있다. 예수에 대한 기독교의 설교는 아직까지도 대중적 이미지가 역사적이라 생각하고 그 이미지를 자신있게 선포하는 사람들에게 맡겨져 있다. 주류 교단의 성직자들이 예수에 대해 설교를 할 때에는 자연스럽게 케리그마, 초대교회의 예수에 대한 메시지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고, 정작 예수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대중적 이미지가 아직도 그렇게 큰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설득력 있고 불가항력적인 대체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것은 비역사적인 이미지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20세기 예수학의 두 가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모종의 도덕적 기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는 몇몇 장면들이 있었다. -얼마 전 로마서를 같이 읽는 수업에서 선생님이 동성애 관련 본문,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동성 성행위를 악으로 규정하는 두 구절(롬 1.26-27)을 1세기 그리스-로마의 자연에 기반한 철학적 이해/견해 위에서 읽는 것의 의미와 자연에 대한 진보된 이해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셨다. 다양한 신앙적 배경을 가진 수강생들을 의식하셨던 것인지 아니면 1세기 문헌을 읽고 해석하는 행위의 기본적 자세를 전달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으셨던 건지 다소 결연해 보이시까지 했다. 내게 사실 이 구절에 대한 성서학적 해석은 이제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것이었지만 컴퓨터 화면 속에 흐르던 긴장은..
"나는 자기는 한 사람의 개인이지 사회적 현상은 아니라고 큰 소리로 항의하는 역사가보다는 자기 자신의 상황을 최대한 의식하고 있는 역사가가 자신의 상황을 더 잘 극복할 수 있고, 또한 자신의 사회와 자신의 사고방식이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 속한 사회와 사고방식과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더 잘 평가할 수 있다고 감히 확신한다. 자신의 사회적, 역사적 상황을 넘어설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그 상황에 자신이 어느 정도 포박되어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그 분별성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64) 『역사란 무엇인가』, E.H.카, 김택현 옮김, 까치, 2015 그러니까...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누군가는 다 해놓았더라는...아님 누군가 해놓은 말을 어디선가 듣고는 내가 생각한 것이라고 착각하는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