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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284)
여기 우리들의 신학
청어람이 주관한 가 막 끝났다. 존경하고 좋아하는 두 선생님을 한 화면에서 볼 수 있다니 행운이었고 두 분이 서로를 존중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생각이 짧고 지식도 모자란 나는 두 분의 대화를 보며 그냥 마냥 행복했다. 청어람 간사님의 진행도 겁나 프로페셔널...청어람이 외연을 확장하면서도 내용을 충실하게 다지며 잘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든든하고. 소위 복음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은 대화할 수 없을 것 같은 막연한 우려가 늘 있었던 것 같은데, 두 분의 대화는 나의 이런 우려를 많이 누그러뜨려주었다. 김근주 교수님이 『성서, 퀴어를 옹호하다』를 옹호하기로 작정하고 나오셔서 차이가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언젠가 신학적 의견이 다른 그러나 서로의 학문을 존중하고 성서를 사랑하..
방송클립은 참 신기해서 온라인상에 공유되고 있는 이상 그것은 언제나 현재형인가보다. 나 역시 즐겨듣는 팟캐스트의 최신 업로드가 소진되면 몇 년 전 것까지 거슬러 올라가 듣기도 하니까. 얼마 전 네이버 오디오 클립에서 양혜원박사 편을 들은 청취자가 비판의 댓글을 남겼다. 여러모로 안타깝다고 하셨고 (당신들) 신학자가 맞느냐고 질문하셨다. 우린 신학자가 아니다. 그 방송에 참여했던 이들 중 그나마 신학을 접해본 사람도 나 하나 뿐. 다른 분들은 그저 진지한 크리스천, 비판적 가나안성도, 경건한 무신론자. 벌써 2년이 흘렀건만 나는 여전히 신학자가 아니라 헤매고 있는 신학생에 불과하다. 우리의 이야기에는 많은 오류와 헛점이 있고 우리는 흥분 가운데 품위를 잃기도 했다/한다. "인간에 대한 총체적 이해보다 여성..
"가부장제 구조와 남성중심주의가 규범으로 작동하는 교회와 사회에 단순히 여성을 진출시킨다고 해서 페미니스트 신학, 우머니스트 신학, 무헤리스타(무제리스타) 또는 라티나 신학, 그리고 제3세계 여성신학이 추구하는 해방의 목표가 달성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여성을 교회와 사회에 넣고 잘 저어주는 이런 레시피로는 여성은 남성이 규정한 사회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재증을 도외시하다 나중에 더 큰 문제를 야기할 뿐이다. 그보다는 교회와 사회의 전체 구조가 상호 파트너십에 입각한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공간으로 변혁되어야 한다. 이러한 목표야말로 새로운 정의다" 여성을 교회와 사회에 넣고 잘 저어주는 이런 레시피, , 박총 옮김, 2007, 154쪽 "여성을 교회와 사회에 넣고 잘 저어주는 이런 레시피...!" 여기 ..
"북미 너머를 살펴보면, 신학 교육이 제공되고 경제상황이 허락하는 어디에서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큰 대가를 치르는 여성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인도에서 호주, 벨기에에서 브라질, 나이지리아에서 코스타리카, 이탈리아에서 한국까지, 여성들의 신학공부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깨달음을 추구한다. 이는 모든 여성들, 즉 피부가 검고, 갈색이고, 노랗고, 붉고, 하얀 모든 여성, 특히 가난하고, 억압받으며, 변방에 거하면서도 충만하게 살아가는 여성들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살아 있는 여성이여, 하나님께 영광이로다(Gloria Dei, vivens femina). 이들 여성 신학도들은 성차별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앗아가는 모든 힘을 짚고 넘어간다." 엘리자베스 A 존슨, , 박총 옮김, 2007, 15..
밤쉘에서 Fox news의 사장 로저 에일스는 방송국에서 앵커로서 성공을 열망하는 야심있는 여성 케일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예쁘구나. 나는 너를 뽑아내서 앞줄에 세울 수 있단다…그러나 네가 해주어야 할 것이 있어. 그게 뭔지 알겠니?” … “충성(loyalty)을 보여줘야해. 그걸 어떻게 증명할지는 생각해보렴.” 룻기를 읽으면서 밤쉘의 장면들이 떠올라 당혹스럽다. 보아즈는 나오미에게 집안의 땅을 되찾아줄 구원자다. 그가 구원자,고엘이 되도록 만들려면 룻이 역할을 해야 한다. 나오미는 룻에게 상세한 지시를 내린다.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옷을 모두 벗고, 그의 발치에 누워라” 룻은 시어머니가 명한 대로 한다. 자신의 발치에서 벌거벗은 룻을 발견한 보아스는 너의 충성이 만족스럽다고 말하는 것 ..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가 이리가라이의 여성성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남근중심의 서구문화와 제도들이 억압해온 여성 특유의 육체적 충동이나 감각을 기존 언어를 답습하지도 완전히 벗어나지도 않고서 담론화해 내는 일이다. 기존 언어를 벗어날 때 광기와 히스테리의 언어가 되어 소통이 되지 않고, 기존 언어 안에만 있으면 남성적 언어를 반복하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존 언어를 경유하면서 모방하는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담론 만들기" 태혜숙,, 26-27쪽 "기존 언어를 경유하면서 모방하는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담론 만들기" 소통을 위해 기존 언어를 사용해야 하지만 기존 언어가 구성하고 있는 남성중심성, 남성 하나님의 광범위한 영토에 불시착하지 않고 유유히 그것을 넘어 존재조차 인식되지 않았던..
"(데리다에 따르면) 의미를 하나로 고정시키는 태도는 획일화하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 의미의 미결정성이 함축하는 유연함과 탄력성에 기존 상징계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태혜숙, , 여이연, 2001, 24쪽 성서의 텍스트를 해석할 때 정통적이라 주장되어 온 하나의 의미를 고정시키기 위한 해석의 변주(종종 여성주의적 해석인 듯한 옷을 입는다) 와 텍스트가 제공하는 의미의 미결정성의 충분한 공간, 그 안에서 유연함과 탄력성에근거해 기존 상징계에 도전하고 변화를 추구하는 해석 둘 사이에서 헷갈릴 때가 많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 성서본문이 여성을 위하고 있다고 말할 때 더 정신을 차려야한다. 그런 본문이 전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해석이 기존의 상징계에 대한 분노와 적대감을 누그러뜨리고 타협하..
“생명의 직설법은 실천과 분리될 수 있는 지위에 관한 진술이 아니다. 그 실재가 반드시 실천으로 증명되는 실존에 관한 진술이다. 이 생명은 인간에 의해 생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에 의해 표현된다. 인간에 의한 표현이 없다면 이 생명은 실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존 바클레이, 721쪽) 너무 멋진 말이다! 지위는 실천과 분리될 수 있다. 우리는 더 큰 도덕적 책임을 수반할 것이 예상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지위와 분리된 삶을 수없이 본다. 그러나 인간의 실존은 실천과 분리될 수 없다. 삶이 한 사람을 서술하며, 한 사람은 그 삶에 의해 표현된다.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는 지위가 아니라 실존이다. 삶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 실존이며, 삶이 실존의 술부다. 우리 중 누가 하나님의 딸, 아들이며 ..
“이 통일성이 성, 인종, 신분의 피상적 차이에 기반을 둔 본래의 자연적 동일성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일반적인 가치 평가의 지속적 차이들을 파괴하는 사건과 하나가 되는 연대성이다.” (존 바클레이, 670쪽) 바클레이의 ‘선물’개념에 기반한 갈라디아서 주해 부분을 꼼꼼히 읽어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들을 가끔 만나곤 한다. 예를 들면 위와 같은 경우인데 이 통일성: 갈 3:28 세례공식의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선언 - ok 성, 인종, 신분의 피상적 차이 -? 성과 인종과 신분이 같은 범주로 묶일 수 있는가? 피상적 차이라는 기준에서? 성의 차이는 피상적인가? 인종 즉 문화, 언어, 역사의 차이는? 이것들 중 피상적이라는 말과 어울리는 것은 신분...정도일 것 같은데?..
문득 든 생각인데, 신천지 그룹이든 전광훈 그룹이든 자신들의 행동이 “비정상적”인 것에 대해 자신들은 세상의 가치와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물론 그들은 “다르다” 그러나 그들이 신의 이름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다. 세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강력하게 추동하는 이른 바 “가치”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의 이해 관계에 정면으로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바로 성령에 의해 추동되는 삶의 방향이고,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악의적으로 이름을 붙이자면 “반사회적”이라 불릴 수도 있다. 정사회적이라는 것이 자본주의의 논리에 순응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세련된 신자들과 교회들이 “비정상적”인 기독교 집단과 서둘러 선긋기에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