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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글/신나(신학생 나부랭이)의 글 (284)
여기 우리들의 신학
신명기 22: 5 여자는 남자의 옷을 입지 말고, 남자는 여자의 옷을 입지 마십시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이렇게 하는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신실한 트랜스젠더들에게는 곤혹스러운 본문. 그들은 자신들이 성서의 가르침을 어기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종교 귄위자들은 이 구절을 사용해서 트랜스젠더들을 단죄했다. 그(랍비)는 나에게 구약성서를 인용해서 “여자는 남자의 옷을 입지 말고, 남자는 여자의 옷을 입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내가 남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주님의 눈에는 네가 남자이고 항상 남자일 것이다”라고 했다. 자신이 항상 여자라고 알고 있었던 소년이 평생 겪은 고통에 대한 공감 없이 단지 율법주의적 개소리였다. ⟪트랜스젠더와 기독교 신앙⟫, 저스틴 타니스 지음, 김준오 옮김,..
“역설적으로, 창세기 1-2장을 읽는 전통적 방법 중에는 남녀 이분법 구성보다는 옴니젠더를 훨씬 강력하게 승인하는 방법이 있다...이 남녀양성적인 존재가 나중에 깊은 잠이 들었을 때, 그/녀는 인간의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진다. 이런 관점에서 인터섹슈얼(간성)은 하나님의 원래 계획의 한 부분일 뿐 아니라 최초의 계획이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남녀양성적인 존재 또는 인터섹슈얼들은 원래의 완점함을 상기시켜 주는 존재들로 볼 수 있다. (버지니아 몰렌코트) 그러나 하나님이 그 흙으로 빚은 존재에서 보신 문제는 그것이 젠더가 결여되었다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외롭다는 것이었다.” *여성과 퀴어 읽기가 성경에서 얼마나 풍부한 것을 건져올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 버지니아 몰렌코트, Omnigender: ..
"창세기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낮과 밤, 바다와 육지, 식물과 동물을 분리시키지만, 우리가 세상을 관찰하면 그 본문이 함축하는 것보다 덜 구별된 것을 알 수 있다. 낮과 밤은 각각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지에 대한 명백한 경계선을 가진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매일 새벽과 황혼 모두가 있어 밤과 낮이 동시에 존재하며, 하나에서 다음으로 넘어가는 시간을 만들어낸다. 조수 간만의 차이는 육지와 바다의 경계선을 구별하기 어렵게 한다. 왜냐하면 육지는 바다 밑에 계속되며, 또한 바다는 해안을 덮치기 때문이다. 식물과 동물을 구별하는 것은 산호초의 경우처럼 항상 쉬운 것이 아니다. 창세기 이야기에서 비록 하나님은 명백히 반대되는 것들을 창조하셨지만, 하나님은 또한 창조의 요소들이 서로 겹치고 융합하는 공간들..
성경 본문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 1) 인간 존재에게 기본적인 질문이 고대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 2) 고대의 남성 중심 언어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 3) 신앙공동체의 대표적인 본문은 당시 기록하고 편집하는 특권을 갖고 있던 고대 남성들의 시각에 의해서 작성되었다는 점 4) 기록과 편집을 담당했던 남성들이 그 시대의 가부장 사회의 가치관을 무의식중에 독자들에게 주입시켜, 그것을 특권적 입장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정당화하는 ‘의식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 5) 이런 본문 안에는 현실 세계에 대한 비판이나 지금과는 다른 세계에 대한 희망이나 전망이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것 6) 이 본문들이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솟아나온 것이 아니라 긴 세월을 거쳐 사람들 사이에 전해 내..
성서학에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쓰신 것이므로 절대적 권위를 부여해서 읽어야 한다는 것을 고집하는 스타일을 “원형”(archetype)이라고 하며 성경을 신앙으로 계승한 것으로 여겨 평가하며 비판적이고 창조적으로 읽는 스타일을 “표준형”(prototype) 이라고 부른다. 원형은 절대적이며 불변적 모델로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에 완전히 복종하든지, 아니면 방치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표준형은 역사적이며 형성적 모델로 성경이 신앙공동체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고 재생되었으며 계승되어 온 신앙의 증언이며 역사 유산이라는 것을 안다. 이런 표준형은 자기 자신의 역사 상황 속에서 성경본문을 평가하며 그에 대해 비판적이고 창조적으로 관여해 가는 것이 신앙공동체에게 소중한 윤리적 과제라는 것..
‘아이히만 재판 최종 판결문' 중에서 “그리고 (마치 피고와 피고의 상관들이 누가 이 세상에 거주할 수 있고 없는지를 결정할 어떤 권한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이 지구를 유대인 및 수많은 다른 민족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하지 않는 정책을 피고가 지지하고 수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즉 인류 구성원 가운데 어느 누구도 피고와 이 지구를 공유하기를 바란다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하는 이유, 유일한 이유입니다.” 한나 아렌트, , 김선욱 옮김, 한길사, p.382 아렌트는 예루살렘에서 행해진 아이히만 재판의 헛점을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파고든다. 이 법정의 많은 한계와 오류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놓은 최종 판결문은 울림을 준다. 판결..
이사야 52:1, 2 너 시온아, 깨어라, 깨어라! 힘을 내어라. 거룩한 성 예루살렘아, 아름다운 옷을 입어라. 이제 다시는 할례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너에게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예루살렘아, 먼지를 털고 일어나서 보좌에 앉아라. 포로된 딸 시온아, 너의 목에서 사슬을 풀어 내어라. 이 본문은 시온을 여성의 성적 사회적 역할인 어머니에 한정시키지 않고 독립적 존재로 이해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이사야 49~66장에 딸 시온의 긍정적 상들이 대거 등장하지만 대부분 가부장제적 여성 역할의 회복을 그리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1절과 2절은 각각 4개(총 8개) 의 여성 2인칭 단수 명령형 동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화자인 주님은 청자 여성 시온/이스라엘에게 주체적으로 일어나서 자유로워지고 힘을 가지고 ..
법률 전문가들은 희생자들의 무국적 상태가 되도록 필요한 법적 조치들을 강구했는데 이 일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나라도 그들의 운명을 문제 삼지 못하게 되고,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국가에서는 그들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었다...유대인 장로회는 아이히만과 그의 부하들을 통해 각 열차를 태우는 데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필요한지 들은 다음 수송될 사람의 명단을 만들어 주었다. 유대인은 등록을 하고 무수히 많은 서류들을 작성했으며, 재산이 보다 손쉽게 탈취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장의 재산 관련 질문지들을 작성하고 또 작성했다...아이히만이 아는 한에서는 아무도 저항하지 않았고 아무도 협력을 거절하지 않았다...아이히만이 말한 것처럼 그의 양심을 달랜 가장 강력한 요인은 최종 해결책(f..
“올 겨울에 유대인이 먹을 것이 없다” “보다 신속한 어떤 수단을 통해 일할 수 없는 유대인을 살해하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해결책이 아닌가. 여하튼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을 굶겨 죽이는 것보다 더 낫지 않은가?” 살인이라는 말 대신 ‘안락사 제공’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들에게 ‘가스를 사용한 고통 없는 죽음’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문제는 양심을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아니라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이 육체적 고통을 당하는 데서 느끼게 되는 동물적인 동정심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것. 힘러가 사용한 책략은 이런 본능을 뒤집는 것으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을 하고 있는가’라고 말하는 대신 ‘나의 의무를 이행하는 가운데 내가 ..
1961년, 예루살렘, 바트 하미쉬파트(정의의 집)의 아이히만 재판 검찰을 위한 유일한 독일인 증인인 개신교 목사 하인리히 그뤼버 감독이 법정에 나왔다. 그는 히틀러에 원칙적으로 반대하면서도 민족주의적 차원에서는 반대하지 않는, 또 유대인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수적으로도 작고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아렌트는 그가 또 다른 독일(대다수의 독일 국민과는 다른 의견을 가진)의 존재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아이히만의 유죄를 입증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고 말한다(아이히만의 유죄 그리고 사형 구형은 재판이 시작되기 전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합리적 의심 너머에 있었다고 아렌트는 비판한다). 이 증인과 관련된 인상적인 한 장면 그리고 아렌트의 일침:..